개명자

안녕? 난 K예요. 이 채널에선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오. 박수 고마워요. 용기가 나네요.

질문으로 시작해볼게요. 대답할 거 없어요. 내 원래 이름이 뭘까요?

이모가 그 이름은 잊어버리라고 했어요. 그런다고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사람들은 날 K라고 불러요. ‘회사’에서는 서로를 다 이렇게 불러요. 무슨 회사냐고요? 이따가요. 회사에선 서로 본명은 묻지 않아요. 이모는 G, 다른 사람들도 E, F, O, V, B.K., T.A., Y.H., P2 등등 이렇게 각자 글자 하나나 두 개로 부르죠. 왜 그럴까요? 어떤 에티켓이나 매너도 결국 누군가의 아무 말에서 시작했어요. 누가 서로 무기로 공격하지 않는단 제스처로 손을 움켜쥐자고 아무 말한 게 악수로 발전했을 거고, 서로 앞글자로 부르는 회사의 이 문화도 누군가의 아무 말로 시작했을 거예요.

이모는 누구냐고요? G란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을 이모라고 불러요. 이모라곤 하지만, 생물학적인 이모는 아니에요. 하지만 세상엔 피보다 진한 게 있죠. 콜레스테롤이 낀 피라든가. 방금 건 내 펀치라인인데. 아무도 안 웃네요. 이모는 인상 잘 쓰고, 활도 잘 쏘고, 목소리도 크고, 나한테 오토바이도 넘겨줬고, 욕도 X나 해요.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욕하는 건 나쁘다고 가르쳤는데 이모는 나한테 그런 건 다 개소리라고 가르쳤죠. 정말 나쁜 건 욕이 아니라 욕을 할 상황이 생기는 세상이라고요. 하지만 내가 욕을 하면 약간 불편해하긴 해요. 그 조금 찌푸린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죠.

이모랑 만난 건 내가 듀랑고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기억하는 날이 있어요. 어린 내가 해변에 앉아 있었대요. 워프에 휘말려서 몰골은 꾀죄죄했는데, 울지도 않고 혼자 있더래요. 애가 품에는 작은 공룡을 꼭 잡은 채로 앉아 있으니까 눈길이 갔나 봐요. 초록색 콤프소그나투스 새끼를 안고 있었다는데 걔도 참 얌전했나 봐요. 이모가 다가왔고, 뭔가 얘기를 하고 내 손을 잡았죠. 잡고 있던 콤프소는 놔줬어요. 우리가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진 기억 안 나요. 이모한테 물어봐도 매번 얘기가 달라서요.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이모가 꽤 마음에 들었나봐요. 내가 순순히 이모를 따라왔대요.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이모가 자기소개를 했대요. G라고 부르든가, 아니면 이모라고 부르든가. 이모라고 불렀죠. 가족이 그리웠나 봐요. 그때 나는 혼자였으니까요. 다른 가족은 어디 있었을까요? 다 지구에 있었을까? 왜 나 혼자 듀랑고에 온 걸까? 여러분도 이 생각 많이 해봤겠죠. 영원히 실종되는 기분 있잖아요.

지구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책에서 읽은 건데, 사람이 심각한 쇼크를 겪으면 쇼크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하네요. 내 경우도 어느 정도는 그런 거겠죠. 그리고 다들 자기 어린 시절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잖아요. 기억나는 건 엄마의 이름뿐이네요.

나도 그 멋진 행성에서 살았어요. 난 오토바이가 있는데 기름 찾는 게 정말 힘들죠. 그런데 지구에선 기름을 월등히 많이 먹는 자동차와 배, 기차, 비행기가 행성 전체를 굴러다녀요. 여기 와서 사진이나 책으로 그런 얘기를 알게 됐어요. 지구는 오래전에 꾼 꿈 같아요. 듀랑고에서 볼 수 있는 건 수평선 뿐이고, 지평선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죠. 지구엔 동서남북 어디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뭍이라니. 생각할수록 멋지네요. 내 가족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이 그런 걸 보면서 살 수 있다면 약간 위안이 되네요. 나만 듀랑고에서 멋지게 사는 게 미안하거든요. 난 사실 회사 사람들이 지구 잘난척 하는 게 별로예요. 듀랑고도 지구 이상으로 멋진 곳이니까요. 지구 생각하면서 감상 젖는 건 내 일이 아니에요. 나는 듀랑고 사람이니까. 지구에서 자랐다는 우리 회사 사람들은 구식이죠.

이모는 회사 소속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회사 사람들과 오래 지냈어요. 이모를 빼면 다들 나한테 쌀쌀맞은 구석이 있어요. 그럴 만도 해요. 나 이후에 회사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거든요. 나도 들어오면 안 됐을 거예요. 이모가 규칙에 예외를 만든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회사에서 나는 뭘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죠. 생각이 길어지다 보면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고, 도대체 회사는 뭐지? 회사는 뭘까요?

내가 가진 사전에 따르면 회사는 상행위나 영리 행위를 위한 법인이라고 해요. 그런데 내가 있는 회사에서 그런 걸 하는 것 같진 않아요. 사실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뭔가 자주 회의도 하고, 나를 빼놓고 어디 가 버리기도 하고, 내가 나타나면 하던 얘기를 멈추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려요. 내가 어렸을 적엔 적당히 몇 마디 거짓말을 던져주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내가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회사 사람들도 골치가 아팠겠죠. 나는 끈질기게 물어보거든요. 그러다 진지한 설명을 들었어요. 미심쩍은 구석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야생에서 안 죽고 살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니 되도록 받아들이고 싶었어요. 그 사람들 얘기로는 이랬어요.

회사는 듀랑고에 워프로 조난된 사람들을 구한다. 그들이 워프 조난 현장에서 신속히 탈출할 수 있게 돕는다. 회사라는 이름은 단지 쿨해서 지었다.

그런 설명만으로 날 납득시킬 순 없었어요. 여러분도 납득하기 어렵죠? 그래서 나는 정말 회사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나도 그런 일에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싶으면 그 거짓말에 집중하세요. 거짓말하는 비용을 비싸게 치러봐야 다음엔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모는 회사에서 모아 둔 여러 장비와 도구를 보여줬고, 나는 그걸 구조 작업에 쓰겠다고 했어요. 산더미처럼 쌓인 무전기라니. 나는 못 봤지만 다들 나만 빼고 모여서 어떻게 할지 얘기를 많이 했을 거예요. 꽤 기다렸죠. 나보고 구조 작업을 해도 된다고 했어요. 뭔가 나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면 늘 그랬듯이 찰리한테 연락을 했죠. 찰리는 누구게요?

듀랑고에선 누구나 자기가 가장 불행해요. 다들 워프에 휘말렸으니까 불행하죠. 난 그 불행 자랑 듣는 건 안 좋아하지만, 찰리를 보면 나는 나았구나 싶어요. 나는 그래도 이모를 만났고, 모두가 우호적이진 않았지만, 다수의 인원이 모인 무리 안에 있었죠. 오해하진 마요. 찰리는 불행 자랑하는 그런 타입은 절대 아니에요. 찰리는 불안정해역에서 자랐어요. 어릴 땐 세상의 모든 섬이 몇 달 지나면 없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자랐어요. 얼마나 불안정한 삶인지 상상이 되나요? 마을섬이나 도시섬이 있단 사실도 모르고 그 많은 섬을 방랑한 거예요. 찰리는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찰리는 혼자서 모든 걸 해냈죠. 머리카락도 혼자 자르고, 옷도 이것저것 주워다 혼자 만들고, 칼도 혼자 만들고, 앵무새도 혼자 키우고.

찰리는 불안정해역에서 자란 터라 섬이 언제 사라지는지를 기가 막히게 잘 포착했어요. 그래서 무전으로 사람들한테 근처 섬으로 가라고 안내해줬죠. 정작 사라지지 않는 섬이 있단 사실은 몰랐어요. 내가 무전으로 그 사실을 알려주자 찰리가 날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우린 그렇게 처음 만났죠. 찰리를 처음 만나기 전날 밤엔 잠을 설쳤죠.

찰리를 처음 만났을 땐 찰리가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컸어요. 우리 둘 다 자기 나이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찰리가 나보다 많은 건 확실했죠. 처음엔 찰리가 너무 많이 웃어서 날 우습게 보나 화도 났지만 몇 분 지나서 나도 따라서 웃고 있더라고요. 찰리는 나랑 많이 다르고 그런 점이 좋아요. 이모는 나랑 나이 터울이 있어서 그런가 내가 하는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할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땐 찰리가 도와줬죠. 찰리는 고민을 잘 들어줘요. 회사에 찰리를 부르고 싶었어요. 내 부탁이면 다 들어주던 이모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그 일로 찰리는 낙심하지 않았어요. 내가 오히려 낙심했죠. 찰리는 어느 섬에다 담쟁이 핀 트레일러를 구하다가 가구로 채워 넣었죠. 찰리는 60년대를 좋아해서 그 시대의 물건들을 많이 구했어요. 그 트레일러에 가면 마음이 참 편했어요. 갈색 카우치가 있고, 채광도 좋고 켜지진 않지만, 텔레비전도 있고요. 탁자보 무늬가 예뻤고,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잔뜩 붙었죠. 찰리는 손재주가 좋아서 섬의 물을 끌어다 수도꼭지에서 나오게 할 줄도 알았죠. 주전자에 물이 끓고, 홍차 내리고, 바위로 만든 오븐에서 쿠키도 만들었죠. 찰리의 트레일러에 가면, 소파에 누워서 노래도 부르고, 옛날 사진 많은 잡지도 읽고, 책도 빌려와서 안 갖다줬어요. 트레일러를 떠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때면 찰리가 항구까지 따라와서는 손을 흔들었어요. 찰리가 혼자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잠깐은요.

찰리는 다른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그런 운명의 사람은 아니었어요. 내 키가 찰리를 넘어설 무렵에 찰리는 여러 섬을 오가는 장사를 하고 있었고, 티스톤을 괜찮게 벌었고, 트레일러 주변에 청소만 전담하는 사람도 생겼죠. 찰리보다 더 차를 잘 끓이고 과자도 잘 만드는 사람도 고용했고요. 찰리의 일을 도와주는 동료들이 늘었고,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찰리는 낙관적인 사람이었고, 돈 버는 데 재능이 있었어요. 단지 불안정해역을 떠도느라 혼자였을 뿐,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정말 뿌듯한 건, 그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가장 좋은 친구라고 불러주는 거죠.

생각해봐요. 찰리의 트레일러 주변에 파티가 열려요. 천막 치고, 탁자 깔고, 온갖 고기와 채소, 향신료를 구해다놔요. 유명한 부족 요리사들도 불러오고 밴드도 부르죠. 찰리 취향이라 60년대 노래만 나오는 게 괴롭긴 하지만요. 그 파티에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수백 명은 있는데, 그 잘난 사람들 다 제쳐두고 나랑 같은 카우치에 앉아서 어릴 때부터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생각해봐요. 사람들은 앵무새 랑고한테 말을 걸어서 찰리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죠. 근데 그거론 부족하죠.

어느 날은 찰리가 트레일러 뒤로 오라고 하더니 손뼉을 딱 쳤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여긴 멸종한 생물은 넘쳐나지만, 우리 같은 인간을 제외한 신생대 생물은 보기가 힘들죠. 근데 찰리의 손뼉에 귀여운 포인터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오는 거예요. 강아지를 안으니까 얼마나 핥아대는지. 인생엔 개가 필요해요. 회사에는 개 몇 마리가 있는데, 다들 무슨 훈련용으로 키운다고 내가 접근도 못 하게 했어요. 피아는 내가 쓰다듬고 만질 수 있는 강아지였죠. 피아를 내 스타일로 길들였죠. 아, 너무 내가 찰리한테 빌붙은 얘기만 했네요. 무슨 얘기 했더라? 아!

찰리는 내 연락을 받고, 구조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어요. 찰리는 열기구를 좋아했어요. 그 열기구가 구조 작업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어요. 우리 둘 다 열기구 책을 읽었는데, 나는 좀 읽다가 캐비닛에다 던져놓고 50년대 만화책으로 넘어갔죠. 찰리는 일을 섬세하게 챙기는 데 강했어요. 그 책을 읽는 데서 넘어가서 진짜 열기구를 만들려고 했어요. 인제 와서 고백하자면, 열기구 만들 재료 좀 구하다가 다른 데 관심이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정말로 띄울 때까지 그 일에 매달리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야생의 땅에서 그저 고기 한 번 먹고 잠이나 잘 자면 그만이지 생각하고 말아요. 석기 시대 수준의 인프라에 섬마다 흩어진 경제력도 한계가 있으니, 지구 같은 부귀영화는 꿈도 꾸지 말라고 그래요. 회사 사람들도 그래요. 나도 그런 얘기 들으면 화는 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사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찰리는 그 와중에 하늘을 향해 날아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만들었죠. 난 남 칭찬을 잘 못 해요. 그래서 찰리한테 열기구 만든 걸 어렵게 칭찬했죠. 그러니 찰리가 뭐라는 줄 알아요?

“찰리는 K처럼 다른 사람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 정말 존경스러워. 찰리도 K처럼 용기를 내서 갈 수 있으면 좋겠어.”

왜 자기 칭찬하는 데 내 칭찬으로 얘기를 돌릴까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말을 돌리다 보니 찰리도 구조 작업에 참여하게 됐어요. 열기구가 있으면, 갓 듀랑고에 온 조난자들이 나쁜 개척자들과 겹치지 않고 마을섬까지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서 사람들이 워프를 겪고 조난될지 예측하는 건 어렵다 보니 우린 기동대처럼 움직였죠. 뭔가 일이 생기면, 정말 발품을 팔아서 찾아가는 거예요. 먼 여행을 많이 했죠. 사람들을 구조하는 게 쉽진 않았어요.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기분 상할 일도 많았죠. 정말 전혀 생각하지 않았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장에선 늘 일어나요. 그래서 일할 땐 최대한 감정을 안 드러내는 버릇도 생겼고요. 회사의 어느 아지트에서 꿍쳐둔 총도 갖고 다니게 됐죠. 아뇨. 농담 아니에요. 난 진짜로 총을 갖고 있어요. 뭐 여러분이 믿든 말든 여러분 자유죠.

일할 때 보면 나 자신이 엄청 냉정하고 까칠한 사람 같기도 해요. 성질도 급하고, 챙겨야 할 거 많이 빼먹기도 하고 그래요. 나도 인간이니까요. 그래도 구조는 좋은 일이에요. 빡치는 일도 많았지만, 응원해주는 사람도 많았어요. 라마는 은은하게 응원하죠.

닥터 라마. 본인은 라마라고 불리는 게 더 좋대요. 라마는 이상하고 독특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찰리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인데, 나이가 좀 있어요. 근데 찰리나 나한테 어른 대접 받으려고 하지 않아요. 나보고 좋은 일 한다며 추켜세워줬죠. 칭찬 한마디 하는 데 자기 연구라든가 소문 들은 거라든가 같은 사족이 많이 끼어들긴 하지만요.

그래서 정리하자면 말이에요. 나는 구조를 해요. 워프로 듀랑고로 오게 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충격을 받아요. 그 사람들이 충격받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듀랑고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죠. 자부심도 어느 정도 느끼고, 소명의식도 느껴요. 그렇지만 그런 걸로만 동기부여를 하는 게 쉽진 않죠. 내 마음 속에 강력한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이루고 싶고, 삶을 쏟아붓고 싶은 꿈. 내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버틸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는 꿈.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라마는 자기의 꿈을 당당하게 반복적으로 얘기해요. 프로파간다 수준이죠. 사람들이 배울 기회가 생기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다. 찰리도 그래요. 사람들이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정말 낙관적이게 될 거다. 이모는? 이모는 나보고 누구보다 잘 살래요. 이게 꿈인가? 피아는? 피아랑 그런 얘긴 잘 안 해서 모르겠네요.

나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요?

나는 내 생각이 어떤 건지 말로 표현하는 방법 같은 건 잘 몰라요. 나는 찰리나 라마처럼 머리가 좋진 않으니까요. 멋들어지고 그럴싸한 얘기를 하는 것보단 그냥 아무 생각 없이요, 솔직히 말해서 오토바이에 시동 켜거나 숫돌에 칼을 갈거나, 총에 녹 안 슬게 기름칠을 하거나, 피아를 훈련시키거나, 화살을 과녁 중앙에 맞추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해요. 이모가 가르쳐준 것들이 그런 차원에서 즐겁긴 하죠. 이모는 랩터 잡을 때 화살을 하나만 쓰거든요. 아 또 다른 얘기로 빠지네. 하지만 뭐 어찌 됐건, 구조를 하는 일 이상으로 내 삶에서 내가 왜 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꿈이 무엇인지 한 번쯤은 생각해봐도 좋은 주제죠.

됐고,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아요?

얼마 전엔 앙코라에 다녀왔어요. 붉고 푸른 섬인데 꽤 예뻐요. 해변에 가서 햇빛이랑 바람 좀 쐐고 머리에 소금 맺힐 때까지 수영도 하고, 기타도 치고 그러려고 간 거였으면 좋았겠지만, 거기에 조난자들이 쏟아졌죠. 거기서 여러 사람을 구했어요. 그 사람들이 마을섬으로 갈 수 있게 도왔죠.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유독 기억에 남아요. 그 사람한테 내가 별명을 붙였어요. 앙코라라고. 앙코라에서 만난 사람이니 앙코라예요. 나도 회사에서 지낸 게 오래 돼서 그런가 사람들한테 콜사인 붙이는 게 버릇이 됐나 봐요.

앙코라라니. 난 보통 조난자를 만나면 그 사람 이름부터 확인해요. 그 사람이 인지 능력이 멀쩡한지 확인하려면 이름과 주소 확인하는 게 기본이거든요. 멀쩡하단 걸 확인하면 다음 일을 위해 잊어버려요. 일을 계속 하려면 일하면서 겪는 일에 하나하나 매달리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앙코라 그 사람은 잊히질 않아요. 그 사람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죠. 그 사람을 보니까 내 원래 이름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거 생각하다 보니 잠도 안 오고, 여기까지 와서 얘기를 하고 있네요.

음. 여러분은 앙코라가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다들 답신도 없이 잠자코 듣고 있더니 왜 갑자기 무전이 많아지나요? 뭔가 웃기네요. 아, 그만! 앙코라가 어떤 사람인진 여러분한테 안 알려줄 거예요. 여러분은 세상만사를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런 쪽 얘기가 아니에요. 어쨌든 앙코라를 만나고 여러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는 일, 회사, 이모, 피아, 찰리. 정말 내가 아는 건 다 한번씩 생각해보고 있네요.

워프에 휘말리면 다들 자기가 죽을 거라 생각해요. 생각나진 않지만 나도 그랬을 거예요. 워프 때문에 죽는 사람도 많죠. 하지만 워프의 순간이 지나고 깨어나게 되면,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요. 여긴 듀랑고예요. 새로운 세상이죠. 여기서 많은 사람을 봐요.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영 아닌 사람도 있죠. 불안정섬, 마을섬, 도시섬, 무법섬, 바다와 해변, 산과 골짜기, 들판과 숲. 참 많은 곳에 개척자들이 있어요. 그 많은 사람이 여러 순간을 살아가고, 언젠가는 다 죽어서 묻히고 잊히겠죠. 그런데도 다들 주어진 시간엔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어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계속 그럴 거예요.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은 조난자들조차도, 몇 마디 말과 비상식량을 쥐여주면 다시 살아가죠. 난 거기에서 뭔가를 느껴요. 우리가 계속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

내 꿈은 어쩌면 그 무언가일 수도 있겠네요. 그 무언가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 방금 생각한 거라서 나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듣기에 괜찮은 것 같아요. 앞으로 누가 물어보면 이걸로 대답해야겠어요. 괜찮죠?

여러분. 어찌 됐건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뭔가 속이 후련하네요. 앙코라와 만난 뒤로 뭔가 머리가 복잡했거든요. 처음 보는데 뭔가 낯익었어요. 자꾸 내 원래 이름이 생각나고요. 지금 듀랑고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딱 세 명 있거든요. 나, 찰리, 이모.

이건 내 망상인데 왠지 이모라면 우리 엄마를 정말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K라고 불리는 건, 이모가 회사의 직원들이 쓰지 않는 남는 글자 중 하나를 골라줬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K는 우리 엄마의 이름 첫 글자이기도 하죠. 뭐 정말 내 망상이네요.

무전 들어줘서 고마워요. 이제 졸리네요. 난 그만 잘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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