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소녀는 부모가 없었다.

부모는 워프 직후에 나타난 낯선 개척자들의 칼에 스러졌다. 소녀가 절망했을 때 부족장이 나타났다. 부족장은 얼굴 전체에 비늘 문신을 덮어 두 발로 걷는 육식공룡 같았다. 부족장은 등부터 엉덩이까지 타르보사우루스 문신을 새겼고, 가죽을 덧댄 청바지에 뽑아낸 적의 이빨로 장식을 달았다. 부족원은 부족장을 머리잡이라고 불렀다. 머리잡이는 살인자들을 벌했다. 부족은 소녀를 거뒀다. 부족엔 소녀처럼 온 무리가 더 있었다. 소녀의 나이가 열일곱 정도 됐고, 더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부족의 병사가 됐다.

그들은 뗏목을 타고 낯선 섬으로 갔다. 바다는 파도로 들썩거렸고, 세상은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섬은 탐욕과 분노로 불꽃을 피웠고, 그림자가 춤을 추며 벽화를 그렸다. 소녀는 화살을 쏘고, 거점마다 천막의 뼈대를 세웠다. 발품을 팔아 구한 잎사귀와 가죽으로 뼈대를 덮었다. 모닥불 옆에 앉아 피가 엉긴 갑옷을 씻고 기름을 발랐다. 전투가 벌어지면 적군은 하늘로 불화살을 쏘아 올렸고, 들어본 적 없는 언어는 허공을 증오로 메꿨다. 소녀는 그렇게 듀랑고에서 자랐다.

머리잡이는 죽음을 몰랐다. 싸움이 붙으면 칼로 방패를 때리며 제일 먼저 앞으로 뛰어나갔고, 적이 항복할 때까지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손에는 적의 머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머리잡이를 숭배했다. 아이들은 새로 만든 수건을 들고 그가 돌아오면 살갗에 묻은 피를 닦았다. 가장 부드럽고 품질 좋은 수건은 피범벅이 되어 그대로 버렸다. 민물에서 잡은 고기로 포를 뜨고, 후추를 뿌린 맑은 국물을 곁들여 다른 반찬과 머리잡이의 식탁에 올렸다. 머리잡이는 몇 숟갈 뜨고는 부하들에게 나눴다. 머리잡이는 따뜻한 천막에서 자지 않았다. 참호를 파고 경계를 서는 병사들과 함께 다이어울프를 통째로 벗겨낸 모포를 두르고 황야에서 잤다.

소녀는 활을 잘 쐈고, 언제 화를 내야 할지 감각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줄 알았다. 머리잡이는 그런 소녀를 칭찬했고 부관으로 삼았다. 부족장의 무전기와 칼을 들고 다니는 게 소녀의 일이 되었다. 무전기는 듀랑고의 물건은 아니었지만, 워프의 신비로운 영향을 받아 다들 유용하게 썼다. 소녀는 낯선 자가 머리잡이에게 다가오면 활을 들어 위협했다. 머리잡이가 손짓하면, 화살이 상대를 꿰뚫어버릴 것이었다. 소녀가 호전적일수록 머리잡이는 만족했다. 소녀는 화살촉을 뾰족하게 다듬고 독을 바르면, 세상의 모든 게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좋은 날들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무전기 너머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닥터 라마라는 자가 머리잡이의 잘못을 거론했다. 소녀는 무전기 건너의 사내가 자신의 부족장을 거론했을 때 분노했다. 사내는 소녀가 아는 언어의 방언을 썼다. 그 방언 사이엔 소년병이란 말이 계속 섞였고, 소녀는 그 개념이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다. 소녀의 협박에도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내는 위치를 물었고, 화가 난 소녀는 보이는 별자리의 이름, 섬과 항구에 개척자들이 붙인 이름을 알려주었다. 덧붙여 사내가 자신들의 땅에 오면 머릿가죽을 벗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며칠 뒤에 백기를 든 라마가 나타났을 때 소녀는 놀랐다. 흰 머리의 라마는 침착하게 걸어 나왔다. 라마는 키가 컸고 체격은 다부졌지만, 걸음걸이나 눈빛 어디에도 듀랑고에서 볼 수 있는 폭력이 배어 있지 않았다. 소녀는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컸지만, 라마는 그런 소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다. 부족의 병사들이 라마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머리잡이는 참호에서 나와 부채를 부쳤다.

소녀가 시위를 겨눴다. 머리잡이가 지시하자 소녀는 억센 줄기로 만든 새끼줄로 라마의 손을 묶었다. 라마는 저항하지 않았다. 라마의 행동은 전장에서 보던 병사들과는 달랐다. 라마는 머리잡이에게 간단히 자기소개했다.

나는 무전기 대학의 라마여. 머리잡이. 자네 이름은 많이 들었어. 괜찮다면 자네가 소년병들을 전장에서 풀어주고, 마을섬 같이 안전한 곳에 보내줬으면 하는데 말이여. 소년병을 쓴다는 게 얼마나 인륜에 반하는 범죄인지는 알고 있지? 자네.

소년병. 그 단어에 소녀는 화가 났다. 입 다물어. 소녀가 라마를 밀쳤다. 라마는 앞으로 쓰러져 모래더미에 얼굴을 부딪혔다. 턱까지 코피가 흥건했다. 머리잡이는 비웃었다. 쓰러진 라마 옆에 앉아서 부채로 뺨을 때렸다.

여긴 듀랑고다. 노인네. 여기에 있는 이 아이들은 소년병이 아니고 똑같은 전사다. 이 아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투표권도 줬다. 투표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면 누구나 어른이다. 그런 얼빠진 얘긴 지구에서나 해.

라마가 답했다.

여긴 듀랑고고, 나는 라마여. 근데 자네, 진짜로 저 친구들한테 투표권이란 걸 행사하게 한 적은 있는겨?

머리잡이는 그 말에 라마를 발로 찼다. 라마는 길게 신음을 냈다. 모여든 병사들은 처음엔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머리잡이가 웃자, 그제서야 따라 웃었다.

이놈은 스파이다. 요사스러운 말로 너희를 현혹한 뒤에 칼로 찌를 놈이다. 가둬라. 다른 부족에서 이놈 갖고 연락 오는 게 있을 테니 잘 감시하도록.

라마는 구덩이에 갇혔다. 쓰레기를 모으는 구덩이였다. 음식물 썩는 냄새가 나고 파리가 잔뜩 들러붙었다. 적군의 포로들은 구덩이에 갇히면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했다. 라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소녀는 활을 쏘고, 적진을 살폈고, 군장을 게을리 관리한 병사들을 채찍질했다. 머리잡이는 참호에 불을 피우고 향을 태웠다. 머리잡이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동안, 병사들이 사냥꾼들의 주문을 외웠다. 기괴한 화풍의 화가가 참호의 벽에다 물감으로 머리잡이가 티라노사우루스의 머리를 베는 모습을 그렸다. 어린 병사들이 염색대에 염료를 던지고 하루 종일 막대를 저어 물감을 뽑았다.

소녀는 밤이 되자 구덩이에 들렀다. 라마는 구덩이가 좁은지 기우뚱하게 앉아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라마가 고개를 들었다. 소녀가 말린 과일 몇 점을 창끝에 끼웠다. 라마는 몸을 일으켜 과일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창날에 베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라마는 다 먹자 바닥에 앉았다. 구덩이의 좁은 틈새로 하늘이 보였다. 별이 느리게 움직였다.

왜 왔지?

소녀의 말에 라마는 미소를 지었다.

소년병을 두는 게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알려나 주려고 온 것이여.

소녀는 창날로 흙더미를 쿡쿡 찔렀다.

심리전 하러 온 스파이 같은데, 우리는 그렇게 흔들리지 않아. 우리 부족은 이 바다, 이 섬을 모두 다스릴 운명을 타고났다.

라마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아, 이제 알겄네. 자네가 내 머릿가죽을 벗기겠다고 한 그 친구여, 맞지? 아니 뭐, 그 말은 신경 쓸 거 없고. 우린 그때 무전기로 토론을 한 거니까. 토론에선 워낙 다들 비약이 많아서, 상대가 내 머릿가죽을 벗길 거라고 해도 나는 이해혀. 감안할 수 있어. 자네도 병사라고 하기엔 어려 보이는데, 이 소년병 문제에 뭔가 불합리함을 느끼진 않는겨?

소녀는 앉았다. 악취가 구덩이에서 올라왔다. 바람이 불고 이마의 땀이 식었다. 주둔지는 고요했고, 벌레 울음소리만 들렸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소녀가 말했다.

너는 이상한 인간이다. 스파이는 목을 베. 알고 있지?

나는 스파이는 아니니까, 그 문제는 걱정 안 혀.

소녀는 막사로 돌아왔다. 부모가 죽던 순간을 떠올렸다. 칼을 든 낯선 개척자들은 얼굴에 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다. 소년병. 소녀는 그 뜻을 듀랑고에 오기 전에 배웠기에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일이 갑자기 꿈에서 깬 것처럼 흐려졌다. 소녀는 누울자리 밑에 숨겨둔 자신의 가방을 열어 사전을 꺼냈다. 페나코두스 가죽으로 등갓을 씌운 등불로 책을 비췄다. 글자는 여전히 종이마다 빼곡히 들러붙어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다시 밤이 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소녀는 스파이와 관련된 무전을 기다렸다. 무전은 없었다. 동이 트면 북을 쳤다. 소녀는 침구를 정리하고 천막 기둥에 붙인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막사를 나서자 자신보다 더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이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칼을 갈고, 부뚜막에서 요리하고, 활줄을 걸어 당기고, 바느질했다. 간혹 나이 든 병사들에게 얻어맞기도 하는 게 보였다. 경계 근무 때 졸았단 이유로 한 소년은 기둥에 며칠째 묶였다.

머리잡이는 랩터에 탔다. 그의 랩터는 성질이 좋고, 참을성이 강해 오래 달릴 수 있는 놈이었다. 부관인 소녀도 칼을 들고 함께 탔다. 부족의 장교들이 뒤를 따랐다. 높은 고지에 올라서, 다음 전투를 구상해야 했다. 강이 흐르는 언덕은 갈대가 우거졌다. 큰 칼로 갈대를 베어 나아갔다. 시선의 끝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머리잡이가 금이 간 쌍안경으로 먼 곳의 부족 주둔지를 들여다봤다. 넌지시 말했다.

저자는 어느 부족 소속도 아냐. 여러 섬에서 유명하다. 닥터 라마라고, 아직도 여길 지구로 착각하는 미친 놈이야. 무전기로 교육을 해서, 세상에 더 많은 기회를 주겠다, 이런 감상적인 개소리를 하는 놈이지.

머리잡이가 쌍안경을 건넸다. 소녀도 먼 곳을 바라 보았다. 몸을 나뭇잎으로 두른 적군들이 커다란 워프홀 주변에 진지를 짓고 있었다. 눈은 렌즈 건너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리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소녀는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10시 방향 쪽이 취약해 보입니다. 방어탑도 부족하고, 병사들 상태를 보아하니 워프 간섭 때문인지 식량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주 좋아. 다른 참모들은 아부 밖에 할 줄 모르지만, 넌 여기서 유일하게 작전을 할 줄 아는 놈이야.

머리잡이는 앉았다. 소녀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폈다. 다른 장교들도 앉아서 함께 앉았다. 머리잡이가 목탄으로 지도에 선을 그었다.

그러면 그놈은 스파이가 아닙니까?

그래. 스파이 아니지. 근데 스파이가 아니면 뭐? 아직 화살로 적을 맞추지 못하는 놈들 있지? 그놈들에게 실전 연습시켜.

소녀는 숨을 골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잠시 기다렸다.

섬마다 알려진 자라면, 당장 죽이는 것보다 선전이나 이런 데 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도를 보던 머리잡이가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나한테 아이디어를 낸 거냐? 네가 듣기에 내 아이디어가 별로다 이 얘기냐?

머리잡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소녀는 답하지 않았다. 다른 장교들이 건방지다고 채찍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리잡이는 한참 노려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래. 이렇게 직언을 할 수 있는 부관도 있어야지. 다른 놈들은 입만 살아가지고 말이야.

머리잡이가 일어나 다른 장교들에게 나무몽둥이를 휘둘렀다. 장교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몇몇은 이빨이 깨졌다.

오후에 적대 부족의 병사 몇이 근처로 다가오자 잡았다. 소녀는 화살로 하나를 맞추었다. 피 냄새를 맡은 랩터가 빠르게 달려갔다. 우거진 숲을 달렸다. 맞춘 데서 멀리 벗어난 곳에 소녀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허벅지에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적은 칼을 들고 있었지만 저항할 힘은 없었다. 칼을 들었다가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소녀는 활로 한참을 겨눴다.

쏘지 않고 내렸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소녀가 허벅지에 꽂힌 화살의 끝을 잘랐다. 가죽 가방을 열어 가루약을 뿌려 상처를 소독했다. 적은 칼을 들었지만, 소녀가 손목을 세게 후려치자 떨어뜨렸다. 몇 번 더 실랑이가 있자 소녀는 적의 얼굴을 몇 대 때렸다. 저항하던 적은 소녀가 붕대를 감싸주고 있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고 그제야 조용해졌다. 붕대를 다 싸맨 뒤에 소녀는 가위를 꺼내 적의 머리카락을 한 뭉치 잘랐다. 적은 놀랐지만 저항하진 않았다. 적의 랩터들이 발굽 소리를 냈다. 소녀는 돌아갔다.

왜 머리를 베어오지 않았지? 하나 맞췄잖아.

머리잡이는 소녀가 돌아오자 반가워했다. 소녀는 잘라온 머리칼을 흔들었다.

무겁고 거추장스럽습니다.

해가 지자 가장 어린 병사들이 허수아비에 화살을 쏘는 법을 연습했다. 소녀는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겨눈 자세를 고쳐주었다. 소녀가 모닥불 옆에 앉자, 다른 병사들이 와서 일을 보고했다. 소녀는 다른 아이들을 불러서 앞으로 있을 훈련을 설명했다. 자신과 가까운 아이들은 따로 불러내 식사를 했다. 창고에 보관 중이던 가장 좋은 고기를 꺼냈다. 나이 든 장교 하나가 부족장의 것이라며 꼬투리 삼자 소녀가 나무몽둥이로 장교의 코를 부러뜨렸다. 머리잡이는 참호에서 명상했다. 다른 장교가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하자 무척 좋아했다. 코가 부러진 장교는 막사로 돌아가 베개를 적시며 울었다. 소녀와 가까운 아이들은 가장 좋은 고기를 돌판 위에 굽고 후추를 뿌렸다. 소녀가 무언가를 말하자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녀는 불꽃이 사그러들 때까지 모닥불에 앉아 있었다. 오늘 밤엔 어린 것들 위주로 정신훈련을 할 거니까 모두들 깨어서 기다려라. 소녀가 말하자 아이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기다렸다.

한밤이 되자 소녀는 구덩이에 갔다. 라마는 앉은 채로 잠을 잤다. 오물이 잔뜩 묻었다. 소녀가 창의 뭉툭한 끝으로 라마를 찔러 깨웠다. 라마는 약간 지쳐 보였다.

지구와 듀랑고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지?

소녀의 말에 라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작게 말했다.

같지. 근본적으론 같어. 자네 그거 아는가? 수 만 년 전에 벽에다가 벽화를 그리고, 풀잎을 뜯어먹고 죽은 동물 살을 훔쳐 먹던 그 친구들도 지금 데려와서 전투기 훈련을 시키면, 우리와 똑같이 전투기를 탈 수 있어. 뭐 그때나 지금이나 그게 어려운 친구도 있겠지만, 내 얘기는 말이여. 우린 그저 조건이 달랐을 뿐이여.

소녀는 짧게 답했다. 개소리.

소녀가 창끝에 물주머니를 달고 작게 구멍을 냈다.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라마는 물주머니에 입을 대고 마셨다. 무게중심을 잘못 잡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라마는 물주머니를 다 비우고 말했다.

나의 얘기는, 그, 뭐 예시가 중요헌 것은 아니고. 결국 교육이 중요하단 얘기여. 비록 이 열악한 듀랑고라도, 교육의 조건이 개선된다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여. 우린 오랫동안 배우고 공부한 끝에, 소년병 같은 건 글러 먹은 개념이라고 합의를 했어. 나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 합의가, 다른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거라 생각을 혀. 그래서 여기에도 그걸 말하려 온 거여. 자네 같은 아이들에게 창칼 대신 책을 쥐게 해주자고. 교육 말이여.

소녀는 화살로 라마를 겨누었다.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화살촉에 먼 섬에서 구해 온 붉은점도마뱀의 독을 잔뜩 바른 것이었다. 설원의 매머드도 스치기만 해도 며칠은 걷지 못할 분량이었다.

연약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야. 당장 휘두르는 창칼 앞에서 그런 소린 절대 안 먹혀.

라마는 소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부분적으론 일리가 있긴 허지. 근데 왜 자넨 내 얘기를 듣고 있는겨?

소녀는 당긴 줄을 풀었다. 화살을 화살통에 도로 넣었다. 대신 소녀는 구덩이로 침을 뱉었다. 라마는 침을 맞고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소녀는 밧줄을 묶고 던진 뒤에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밀려서 라마는 옆으로 쓰러졌다. 소녀가 라마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이 앞으로 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마. 넌 너무 무모했고 지금은 운이 좋은 것뿐이야. 나한테 교육 타령하는데, 내가 말하는 게 진짜 교육이야. 어떤 일을 할 땐 상대가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하면 안 돼.

소녀는 라마를 뒤돌려 세운 다음에 칼로 손목을 묶은 줄을 풀어주었다. 억세게 묶어 놓아 손목의 살이 까져 있었다. 라마는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 소녀는 먼저 구덩이 밖으로 올라오고 라마가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라마는 올라오더니 누워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소녀가 라마의 소지품이 든 가방을 던졌다.

무전기로 교육을 한다고 했지? 마을섬에 아는 사람들도 많나?

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네도 수강할 생각 있는겨? 괜찮은 연구 주제들이 있는데 말이여.

부모 없는 애들이 스무 명 정도 되는데, 데리고 도망갈 데 있어?

소녀의 말에 라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뒤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보통 사람은 아니구먼. 라마가 말했다.

소녀는 라마를 먼저 보내고 막사 사이로 오갔다. 경계를 맡은 아이 몇이 놀랐지만 소녀의 손짓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가 지시한 대로 가방을 멨다. 야간에 물자를 옮겨야 할 때도 있다. 소녀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자신들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움직였다. 아이들은 해안으로 갔다. 뗏목이 여러 척 있었다. 아이들이 뗏목에 가방을 실었다. 라마는 파도에 뛰어들어 오물을 씻어냈다. 상처가 소금물에 닿아 화끈거렸다.

아이들은 뗏목 주변에 앉아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얼굴이 더러웠고, 졸음에 겨운 표정이었다. 한 아이가 울자 소녀가 뺨을 때렸고 아이는 조용해졌다. 소녀는 주둔지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둔지는 조용했다. 소녀가 손짓하자 라마는 뗏목으로 다가왔다. 몇몇 아이가 라마를 보고 놀랐다. 누군가 주둔지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소녀와 친한 아이들이 제압했다. 몇몇은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손을 묶어야 했다. 아이들은 뗏목을 바다로 밀었다. 라마도 함께 밀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끝났어.

소녀는 라마를 다시 한번 비난했다. 라마는 동의했다.

도망갈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일이 이거 참. 자네한테 너무 큰 걱정을 끼쳤구만.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이렇게 할 줄은 몰랐네. 미안하게 됐네. 정말 미안혀.

뗏목이 파도에 휘청거렸다. 덩치 작은 아이들을 뗏목으로 올리고 큰 아이들이 힘껏 밀었다. 물살은 거세게 저항했다.

소녀가 물었다. 확실하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수 있는 거지?

약속혀. K라고 안전한 장소를 아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라면, 왠지 자네랑 친하게 지낼 것 같기도 하고 말이여.

뗏목이 해변에서 멀어지자 밀던 아이들이 모두 뗏목 위로 뛰어올랐다. 라마는 한 번 물에 빠졌다가 아이들의 도움을 받고 뗏목 위로 올랐다. 세 척의 뗏목이 바다를 향했다. 불도 붙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노를 저었다. 모두들 젖은 차림으로 땀을 흘렸다.

뗏목에 오르자마자 소녀는 자신이 믿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상대의 이마를 맞대고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말했다. 네가 정신 차려야 해. 네가 정신 안 차리면 이 애들은 다 죽어. 여기 떠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워프홀로 다니면 소문이 나니까, 걷거나 배로 다녀. 너, 정신 안 차리면, 나중에 나한테 죽어.

반대편의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너는 같이 안 가? 소녀는 답했다.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다시 만나. 라마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소녀가 라마에게 다가왔다. 나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이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라마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녀는 파도를 따라 다시 섬으로 헤엄쳤다. 왜? 라마가 큰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답하지 않았다. 쉼 없이 섬 쪽으로 헤엄쳤다. 꽤 먼 거리였지만 소녀는 결국 해변까지 닿았다. 희미한 달빛에 발자국만 남기고 소녀는 주둔지 쪽으로 사라졌고 다시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노를 저어서 섬에서 더 멀리 벗어났다. 아이 몇이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라마는 무전기를 켰다. 무언가 들리는 소식이 있는지 기다렸다. 워프홀과 멀어지면서 무전기는 힘을 잃었다. 소녀와 친한 아이들이 가방을 열어 마실 물과 음식을 나눴다.

바다에서 식은 해가 떠올랐다. 라마는 해도를 보고 방향을 안내했다. 아이들은 뗏목을 모는 일에 익숙했다.

며칠이 지나 뗏목이 다른 배와 마주쳤다. 불안정섬 캠프로 가는 개척자들의 배였다. 아이들이 가득한 배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라마는 식량과 약을 교환했다. 아이 몇이 열이 났다.

마을섬에 도착했다. 라마는 아는 이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이들은 좀 더 믿을 만한 부족의 사람들을 만났다. 같이 가기를 거부하고 머리잡이에게 충성을 다짐한 몇몇 아이들도 결국엔 따라갔다.

일이 마무리되자 라마는 해변에 누웠다. 누워서 수첩에 메모를 했다. 표정은 어둡고 무거웠다. 무전이 왔다.

이학박사 라마. 채널에 있소? 오랜만이오.

라마의 지인이 인사를 건넸다. 라마의 답이 밝았다.

있수. 자네 잘 지낸겨? 뭐 무전 논문이라도 검토받으려고 연락한겨? 같은 교육자끼리 힘 합치게 자네도 무전기 대학에 합류하는 건 어떤가?

라마의 말에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뭐 그런 이상한 행동은 자네나 하는 거지. 아무튼 흥미로운 얘기를 들어가지고 말이야. 자네 같은 호사가가 관심 있어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어느 섬에 아주 악랄한 부족장이 하나 있는데, 머리잡이라고 들어봤나 몰라. 아주 나쁜 놈이야.

아, 들어는 봤지. 근데 왜?

죽었어.

라마는 몸을 일으켜 바다 너머를 바라봤다. 날이 맑아 푸른 물결이 하늘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평선을 그렸다.

아이고, 악인이라도 누구 죽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여. 그런데 어쩌다가 그리됐대?

라마는 상대의 말에 어떤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몰라. 총도 없는데 맨날 참호 파고 살았다던데, 참호에서 적 화살 맞고 가 버렸대. 그렇게 참호를 파놔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해서, 뭐 나중에 책 같은 거 쓸 때 꼭 후세에 남겨줘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자네도 기억해두라고 말해주는 거야.

라마의 머릿속엔 화살을 든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살은 바람 소리를 내고 날아갔고, 잔혹하고 포악한 부족장도 그 끝은 죽어간 다른 수많은 병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라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 참 끔찍한 일이여. 거기도 그 정도인데 그 무법섬에선 얼마나 심각한 일이 있을지 걱정이여.

그래도 머리잡이가 있던 부족은 잘된 일이야. 부족장 죽고 철수한대. 새 부족장은 그래도 제정신이 박힌 인간인가 봐.

그려? 새 부족장은 어떻다는데?

라마는 답을 기다렸지만, 무전 잡음이 갑자기 심해졌다. 라마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멀리서 불안정섬 하나가 사라지거나, 아니면 생기는지 빛이 솟아올랐고 워프 에너지의 간섭이 심했다. 무전기는 먹통이 됐다. 라마는 일어나서 섬을 한참 달렸다. 땀을 한참을 쏟아내고 흐르는 물에 입을 대고 마셨다. 그리곤 나무 그늘에 누워서 무전기의 잡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허나 날이 아니었다.

그려. 뭐 얘기가 돌다 보면 다시 들을 날이 있겄지.

채널을 돌리자 다른 무전은 잡혔다. K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마는 K와 누군가가 무전으로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을 들었다. 라마는 한참을 듣더니 무전에 끼어 들었다.

무전기 채널을 순회 중인데 말이여, K. 지금 안전가옥에 있나벼?

 

교육자”에 대한 답글 1개

  1.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게 봤어요. 무전기대학의 라마 말고도 위원회나 다른 단체들에 관한 소설도 꼭 써주세요.

  2. 듀랑고는 노트나 이벤트선물만봐도
    짧은글귀인데도
    여운이남아요
    좋은글. 항상 읽을때마다
    그런생각을 했어요
    고맙습니다
    우울한하루인데
    이글을읽으니까
    저에게도
    라마같은 멘토가 있었으면.. 하는생각이정말너무..간절히들어요
    라마는 꼭 세상이치에 통달한 사람같아요
    모든사람은 각각 다양하고 다르고
    모든세상에서 각각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데
    라마는
    올바른길을 인도하고 가르쳐줄수있는
    꼭..그런 인물같아서요
    이전 글을 읽지는못했지만요.
    마지막으로 듀랑고를 좋아하는 유저중한명으로서 앞으로도
    좋은 글과 운영 부탁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3. 라마는 꽤 신비한 인물 같아요… 무전기대학의 각종 단과대 학장직을 모두 역임하고 있으면서 혼자 회의하고 총장뽑고 하는 건 라마의 실없는 유머라고 생각했는데요. 어쩌면 듀랑고의 워프에 의해 정말 그만큼의 라마들이 무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4. 라마 이 잔소리쟁이!!!!!!!!!
    맨날 코끼리나 잡으라그러고
    없는 구리 캐오라고 그러고!!!!
    고기 회떠줄께 회나 먹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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