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인

“생명은 소중해요.”

이런 얘길 많이 들었지. 이 말은 이렇게 고쳐야 돼.

“나한테 소중한 생명은 소중해요.”

난 덫에 빠진 짐승을 창끝으로 찔러. 그러면서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하는 건 위선이잖아. 그래.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참 많은 게 손쉬워져. 달걀을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건 수평아리들을 마대 자루에 넣기 때문이었지. 괴롭히지 않고 얻은 달걀값은 한 시간 일해야 버는 돈 정도 될 거야.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는 만큼 우리는 비용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거지.

들판에 어떤 남자가 누워 있었어.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어. 자신은 회계사였다고, 살려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글쎄, 휴머니즘을 발휘해 남자를 메고 모닥불 근처로 데려와 끓인 스튜를 먹이고 나을 때까지 돌볼 수도 있었을 거야. 내가 들고 오긴 무겁겠지만. 하지만 기껏 낫게 했더니 나한테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겨울이었어. 식량이 많지가 않았어. 한 사람이 죽느냐, 두 사람이 죽느냐 문제가 될 수도 있었어. 나는 가죽 이불을 덮고 잠을 잤어. 밤이 되자 남자는 조용해졌어.

며칠 뒤에 갈대밭을 지나는데 작은 공룡들이 무릎 밑으로 뛰어갔지. 감히 사람한테 덤빌 생각은 못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들이 나온 자리로 보니 정장을 입은 백골이 누워 있었어. 알뜰하게 살만 먹어 치웠더라. 관이 가벼워질 테니 장례 치르긴 좋겠다 싶더라.

날 비난하진 마. 조건은 다들 다르니까. 친척들이 수시로 총을 맞아 죽는 동네와 고열량의 칼로리가 장기적으로 자신을 빨리 죽일 수 있다고 고민하는 동네의 도덕이 같을 수가 없잖아? 나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진 후자에 가까웠어. 저녁은 늘 새우가 든 샐러드만 먹었지. 주말엔 어디선가 굶어 죽는 사람들이 몇 주는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을 한 끼에 썼고, 세상은 진보하고 있었고, 나는 느리지만 그 아름다운 위대한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 비행기가 빛의 터널로 휘말리기 전까지만 해도 난기류가 심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도착하면 친구들한테 전화해야지 이러고 있는데 비행기가 그대로 곤두박질쳤어. 친구들한테 늙어 가는 게 싫다고 그랬는데 이제 늙을 기회도 안 주는구나 싶었지. 말은 이렇게 해도 그땐 눈물 콧물이 다 둥둥 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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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 사냥감에 손댔단 이유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은 다음에 듀랑고의 규칙을 배웠어. 코와 입이 연결된 걸 흘린 피를 보고 새삼 알았지. 현실은 갑자기 폭력을 휘둘러. 비행기 추락에선 살아남았지만 어떤 재난에서 살아남은 게 다른 재난을 피하는 면책 특권 같은 게 되지는 못해. 울부짖고 저주하고 거부해도 피할 수가 없었지. 내 바구니에 손댄 도둑의 손을 처음 잘랐을 때는 며칠이고 돌이켰지만, 그렇게 자른 손이 광주리 하나에 그득해지니까 무뎌질 대로 무뎌졌어. 생명이 소중한 건 내가 안 보이는 데서 생명에 대한 비용을 다른 사람이 정산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거야. 자신이 직접 비용을 치러야 할 때가 오면 빚에 쫓겨 산다는 게 얼마나 섬뜩하고 짜증 나는 일인지 알게 될 거라고. 살면 살수록 알게 돼. 생명은 소중해. 아냐. 내 생명은 정말 소중해. 그 말을 안 해도 되는 세상에 살았던 거에 감사하라고.

그런데 말이야. 아주 드물지만 예외가 있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 여자가 그랬지. 여기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여자는 너무 이상해서 기억하고 있었어.

“뭐 당신 얘기는 대강 뭔 소린지 알겠는데, 그런 거 다 핑계죠.”

그 여자가 나한테 했던 말이야. 자신이 살면서 어렵게 얻은 견해가 부정되어봐.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거고 욕을 할 거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냐고, 이런 좀 상투적인 말도 섞일 거고. 근데 그 여자가 총을 들고 있었거든. 그래서 난 좀 누그러졌어.

아, 상황을 설명해야겠네. 나는 사냥을 하려고 가던 길이었어. 밤길이었지. 밤사냥이 위험하긴 해도 잡을 게 풍부하거든.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훤해지는 거야. 이곳에 오면 하늘을 자주 보게 돼. 별을 보고 위치를 파악해야 하거든. 별똥별이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고, 가끔씩 워프가 일어나는 것도 보게 되지. 워프가 나타나기 전의 특징적인 현상이 있는데 빛이 터널처럼 생겨. 그날도 하늘에서 그게 보였어. 그래서 달려 갔어.

워프만 쫓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어. 워프가 발생하는 자리엔 떡고물이 있었거든. 고철 더미나 통신 장비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쇳조각이나 주우러 갈까 해서 갔어.

육중한 무언가가 터널을 지나 나왔어. 비행기였지. 조종사가 어떻게든 완만한 곳으로 고도를 낮추더라고. 큰 소리가 났어. 나는 칼을 들고 다가갔어.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온 게 보였어. 얼굴이 익은 자들도 있었는데 암묵적으로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지.

나무 위에 튕겨 나온 사람들이 걸려 있었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지. 비행기 앞 부분은 완전히 박살나서 거기서 건질 건 없어 보였어. 그 충돌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그나마 있다는 게 신기했어. 기장과 부기장은 죽었는지 승무원이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고 있었지. 사람들이 문에서 뛰어내렸어. 날이 밝은 다음에 오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뭐하는 거죠?”

그 여자가 뒤에 있었어. 뭐랄까. 듀랑고를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사냥꾼도 탐험가도 농사꾼도 무엇도 아닌 것 같았어. 직업이 그 사람을 설명한다는 거에 일부는 동감하는데, 그 여자는 설명할 수가 없었지.

“가려고. 길 막지 마.”

내가 답했지. 난 싸움을 많이 했어. 남자들과 싸워도 힘은 밀리지만 여러 기술적인 면으로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지. 근데 그 여자는 내가 칼을 들고 있는 걸 신경도 안 쓰고 있었어.

“워프가 일어나는 걸 알아보고 온 거잖아요. 아직 탈출 못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가겠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울분이 솟았어. 뒤에서 승무원이 구조대는 언제 오냐고 묻는 것도 신경에 거슬렸지. 이들은 고의로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말에 얼마나 예외가 많은지를 못 본 척하고 있었어. 나는 그 무능한 순수함에 질릴 대로 질렸으니까 화가 났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생명은 소중하니까? 그렇게 잘났으면 너 혼자서 하라고.”

“뭐 당신 얘기는 대강 뭔 소린지 알겠는데, 그런 거 다 핑계죠.”

그 여자 말에 내가 칼을 들었어. 그 여자는 총을 꺼냈어.

“뭐, 어렵게 얘기할 거 없어요. 당신 생명도 소중하잖아요. 안 그래요?”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는 진리의 소리야. 그 소리를 직접 들으니까 머리가 맑아지더라고. 어디서 총을 구한 걸까? 이런 의문은 떠오르지 않았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지. 내 생명의 소중함. 세상엔 미친 사람이 많아. 미친 사람 중엔 남을 구조하지 않으면 널 죽일 수도 있다고 널 협박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여자가 허공에 총을 쏘니까 무정부 상태의 주변 상황이 정리가 됐어. 고철을 챙기던 한량들은 구조대원이 되었고 승무원들은 상황을 통제할 자신감을 얻었지. 불을 피우고 부상자를 근처로 모으고 기내에서 탈출하지 못 한 사람들을 끌어 냈어. 다친 사람들의 피 냄새를 맡고 공룡 몇 마리가 찾아 왔지만 그 여자가 총으로 공룡 머리를 맞췄지. 그 여자는 인본주의자였던 것 같아. 생명은 소중하단 말의 경계를 인간에 두고 있는 거지. 그냥 내 추측일 수도 있고.

주변이 정리되자 그 여자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어. 팩을 하나 건넸는데 안에 식량이 들었어. 배가 고파서 먹었지.

“인간성을 발휘해줘서 고마워요. 1분만 더 일찍 발휘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지만 1분 더 일찍 움직일 수 없는 게 훨씬 더 인간적인 거죠. 알아요.”

그 여자 말이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어. 하지만 총을 앞에 두고 빈정거릴 순 없잖아. 참 웃긴 일이지. 내가 이것저것 말하며 뭔가 세상 진리를 깨우친 것처럼 씨부리는 것도 사실 나한테 약간의 폭력만 향해도 흔들린다는 거잖아. 그래. 이것도 생명이 소중하단 말의 증거지. 정확히는 나한테 소중한 생명은 소중하다. 결론적으로 내 의견이 틀린 건 아닌 거야.

생존자들이 비행기 안에서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어. 그 여자는 오토바이를 끌고 오더군. 헬멧을 쓰면서 자기 이름을 말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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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K예요. 이름 이상하죠? 또 봐요.”

이름만 이상한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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